죽음은 이 세상 누구에게나 두려움과 불안을 주는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죽음은 단순히 모든 것이 끝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아간다는 고귀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계시하신 진리, 즉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진다는 진리를 믿고 고백하는 교회는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위해 잊지 않고 기도합니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부활의 기쁨을 누리도록 도와주는 이 신심은 가톨릭 교회의 가장 큰 신심 중의 하나로서, 11월을 위령성월로 정하고 교회 전체가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11월중에서도 '모든 성인의 날' 다음날인 11월 2일을 특별히 '위령의 날(All Soul'S Day)'로 정해놓고(주일과 겹치는 경우는 11월 3일에 지냅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을 기억합니다. 모든 사제들에게는 이날 미사 3대를 드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998년 일년에 한번씩 위령의 날을 지키도록 명령한 클뤼니수도원의 오딜로의 영향으로 보편화되었고, 1748년 교황 베네딕도 14세에 의해 인준되었습니다.
위령의 날에 드리는 세 대의 미사 중에서 한 대는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의 지향으로, 또 한 대는 죽은 이들을 위해, 다른 한 대는 교황님의 지향에 따라 봉헌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는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열심한 마음으로 묘지를 방문하고 병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권고합니다.
위령성월에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자신의 성화에도 크게 도움이 됩니다.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면 자연스럽게 하느님 나라에 대해 묵상하게 되고,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게 됨으로써, 더욱 성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학자인 성 암브로시오 주교님께서도 "눈물을 줄이고 기도에 힘쓰십시오.
운다는 것은 잘못은 아니지만 당신을 떠난 영혼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을 준비하고, 재림할 구세주를 기다리는 시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대림 시기로 한 해의 전례 주기를 시작하는데, 그 기간은 4주간이다.
[유래]
교회 안에서 대림 시기의 풍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4세기 말경에 스페인과 갈리아 지방에서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6주간 동안 참회의 기간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때의 대림 시기는 전례와는 상관없이 성탄을 준비하기 위한 금욕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6세기 이후 로마와 라벤나에서 비로소 대림 시기가 전례 안에서 거행되기 시작하였으나 그레고리오 대 교황이 4주간으로 고정하였다. 이 지역에서는 대림 시기가 한 해의 끝 무렵에 거행되었고, 그 의미도 때가 차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기쁨에 찬 시기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차츰 다른 지역 교회의 영향으로 구세주의 성탄을 준비하는 금욕적 성격도함께 지니게 되었다.
[전례]
예수가 승천한 후부터 다시 올 때까지 깨어 기다리는 것이 교회의 삶이라면 대림 시기는 이런 교회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시기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오고 우리 구원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음을 확신하며 그분의 오심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림 시기의 전례는 구세주의 탄생 전 4주 동안 미사와 성무 일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 경륜이 완성될 마지막 날까지 교회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도해 준다.
교황청의 전례 성사성은 1970년에 개정한 '로마 미사 경본'에 수록된 <전례력과 축일표에 관한 일반 지침>
(Normae universales de anno litrugico et novum calendarium romanum generale)에서 로마 전례가 지녀온 대림 시기의 두 가지 성격을 보존하여 "대림 시기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들 사이에 오신 것을 기억하는 성탄의 대축일을 준비하는 시기요, 동시에 그와 같은 기억을 통하여 마지막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도록 영혼이 인도되는 시기이다"라고 설명한다.
이어서 "이와 같은 이중적 성격 때문에 대림 시기는 간절하고 감미로운 희망의 시기이다"라고 덧붙이고 있다(39항). 이 지침에 따라 현행 로마 전례에서는 대림 시기를 4주간으로 고정하고 전례의 성격에 따라 두 부분으로 구별한다.
대림 첫 주부터 12월 16일까지의 전반부는 종말론적인 면을 강조하면서,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도록 준비하는 기간이고, 12월 17-24일의 후반부는 임박한 구세주 탄생을 준비하는 기간이다.
대림 시기의 각 주일의 주제도 이와 같은 전례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대림 제 1주일은 오실 구세주를 깨어서 기다려야 하는 교회의 종말론적 자세를 강조하고,
제 2주일은 구세주의 오심에 대비하여 회개하도록 촉구한다.
제 3주일은 구세주께서 오실 날이 가까웠으니 기뻐하라고 권고하며,
제 4주일은 예수 탄생의 예고와 그분이 누구인지를 밝힌다.
대림 시기의 미사와 성무 일도의 기도문들은 주로 이사야 예언서와 세례자 요한의 설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이사야 예언서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어렵고 쓰라린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고 메시아와 구원 시간의 도래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례자 요한도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구세주가 오셨음을 선포하여 신약의 시간을 여는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주님의 길을 닦는 선구자 역할을 하였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이미와 계신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었다. 사람들에게 구세주의 오심을 알리며 회개하기를 촉구하는 세례자 요한은 '대림 시기의 설교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대림 시기는 천주의 어머니 마리아와 구원 신비와의 관계를 두드러지게 보여 주는 시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시기에, 오롯한 마음으로 성자를 기다리는 마리아는 오시는 구세주를 맞기 위하여 준비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때문에 하느님의 구원 경륜에 협력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대림 시기 전례에서 잘 부각된다. 대림 시기에 거행되는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12월 8일)은 대림 시기를 중단하는 축일이 아니라, 구원의 신비의 한 부분을 구현하는 축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죄에 물듦이 없이 잉태된 마리아는 구원된 인류 중의 첫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오심의 결정적 열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을 대림 시기에 거행 하도록 허용한 것이다.
또한 대림 시기에는 제대 주위의 화려함을 피하고 대영광송을 하지 않는다. 오르간이나 다른 악기는 성가를 도와 주기 위해서 사용하며 단독 연주는 피한다. 사제는 회개와 속죄의 뜻으로 자색 제의를 입는다
그리고 이 식에는 대림초를 켜는데 사철나무 위에 4개의 초를 마련한다. 사철나무는 인간에게 내려질 하느님의 새로운 생명을 뜻하고 4개의 초는 구약의 4천 년을 의미한다. 구세주가 어느 정도 가까이 오셧는지 알려 줌으로써 마음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기 위하여 매주마다 촛불을 하나씩 늘려 켜간다.
[신학적 의미와 영성]
대림 시기는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지속적인 대림 시기를 살아야 하는 교회에 깊은 신학적 의미를 보여 주는 전례 시기이다.
구원 신비의 종말론적 차원이 강조되는 시기 : 인간 역사는 하느님의 구원 약속이 실현되는 장소이다.
그리스도는 육신을 취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구세주가 되셨다. 이 부활하신 분이 시간이 다 찼을 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을 믿고 그것이 바로 창조의 완성임을 증언하는 것이 대림 시기이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에서 순례하는 동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이미" 완성된 구원과, 아울러 모든 신앙인 안에서 장차 실현되어야 할 구원과 마지막 날 구세주요 심판자로 다시 오시어 완료하실 구원 경륜의 "아직" 사이의 긴장 속에서 끊임없이 산다. 대림 시기의 전례는 이와 같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구세주를 깨어 기다리는 신앙의 자세를 흐트리지 않도록 강조한다.
희망에 찬 기다림의 시기 : 대림 시기는 신앙인으로서 항상 지녀야 할 자세. 즉 희망에 찬 기다림의 자세를 가르쳐 주는 영성의 학교이다. 그래서 이 시기의 전례는 신앙인들에게 구세주의 오심을 기쁨과 희망 속에서 깨어 기다리도독 강조한다. 첫 주부터 "야회여, 내 영혼이 당신을 우러러 뵈옵니다. 나의 하느님, 당신만을 믿사오니, 부끄러운 꼴 당하지 않게 하시고 원수들이 으스대는 꼴 보지 않게 하소서"(시편 25편)라고 고백한다.
계시의 하느님은 약속에 충실한 분이기에 약속한 구세주를 깨어 기다릴 때 신앙인 개개인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러나 교인들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드러난 실재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구세주가 오고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구원의 소식은 신앙인들에게 기쁨으로 가득 찬 새로운 미래를 약속한다.
지금은 거울을 통해서 희미하게 보지만 어느 날 얼굴을 맞대고 볼 날이 올 것이기에(1고린 13,12) 교회는 이 만남을 깨어 기다리며 기쁨 가운데 살아간다. 대림 시기에 교회가 드리는 기도문 "오소서, 주 예수여!"(묵시 22,20)는 기쁨에 차서 기다리는 교회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회개의 시기 : 주님께로 향하는 회개 없이는 그분의 오심을 깨어 기다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삶을 정비하고 새롭게 주님께로 향하여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 대림 시기의 영성이다.
가깝게는 임박한 성탄을, 더 나아가서는 마지막 날에 오실 구세주를 만나 뵈올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육화를 통하여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신 하느님은 당신과 친교를 맺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당신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이 다시 당신께로 향하도록 끊임없는 회개를 촉구한다.
대림 시기는 이렇게 회개를 재촉하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에 응답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외치는 세례자 요한의 소리는 참으로 대림 시기의 소리이다. 회개하고 주님의 길을 닦아, 오시는 그분을 영접하라고 재촉하는 외침이다.
길을 닦는 방법은 무엇인가?
겸손하고 온유하고 봉사하는 사람들, 즉 예수가 "복된 사람"이라고 선포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됨으로써 하느님과 형제들을 향하여 자기 자신을 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참고 문헌]
<미사 경본의 총지침>,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9/ 최윤환, <하느님 백성의 축제>, 분도출판사, 1983/ 안문기, <계절과 축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2/ 정대식, <전례와 영성 생활>, 가톨릭출판사, 1993
1.역사
오랜 기다림 끝에 이제 예수님의 성탄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대림시기가 구제주의 탄생을 준비하는 기간이라면 성탄시기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사람이 되시어 이세상에 오심을 기념하는 시기로서, 예수 성탄 대축일 전야부터 주임 공현 대축일 주간 또는 주님 세례축일 까지이다. 그리스도 탄생으로 온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에서 이 시기에 사제는, 어둠을 물리치고 새 생명과 새로운 광명이 떠오름을 찬미하며, 기쁨과 결백을 상징하는 백색 제의를 입는다. 성탄 시기는 4세기 중반부터 보편적으로 지내게 되는데,대림시기가 사순시기 관습을 본받아 생긴 것처럼 성탄시기 역시 부활시기를 모방한 기간으로서, 특별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이 시기는 예수 성탄과 주님 공현의 역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예수 성탄 대축일'은 예수님께서 2천년 전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사건을 기념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 예수님의 탄생일에 대해서는 복음서도 아무런 자료를 제공하지 않으며, 초세기의 문헌에서도 일체 언급이 없다. 12월 25일을 예수 성탄 축일로 지낸 사실을 처음으로 언급한 자료는 354년에 로마에서 기록된 연대기이다. 이 책은 12월 25일을 로마 제국의 축일인 무적의 태양신 탄일(Nativitas Solisinvicti)이라 부르고 335-337년에 로마에서 예수 성탄 축일을 지냈음을 암시하고 있다. 무적의 태양신 탄일은 275년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완공한 태양신전 축성식을 기회로 12월 25일로 지정하였다.
4세기 초엽에 도입된 예수 성탄 축일이 태양신 축일과 같은 이유는 아마도 이 날이 세상의 빛(요한 8,12)이시며 정의의 태양(말라 3,20)이신 예수님의 축일로 지내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정확한 역사적 배경은 아직 잘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후 4세기 말엽이나 5세기 초엽에 이 축일은 동방교회에도
전파되었다. 7세기 경에는 성탄 한주간 뒤인 1월 1일을 성탄 제 8일 축일로 지내기 사작하였는데, 이날에는 천주의 모친 마리아의 탄생도 함께 기념하였다.
같은 7세기에 성탄 축일은 성탄 팔일 축제로 확장되었는데 무엇보다도 부활과 성령강림 팔일 축제의 영향이 컸다. 한편 동방에서는 서방보다 조금 먼저 1월 6일을 주님 공현 축일로 지내기 시작하여 동방교회의 성탄 축일이 되었다.
2.현행 전례 제도
성탄시기는 예수 성탄 전날인 12월 24일의 제1저녁기도 또는 예수 성탄 전야 미사부터 시작하여 주님 공현주일 다음주일인 주님 세례 주일까지 계속된다. 그 기간은 약 2주간으로 부활 축제기간인 부활시기보다 훨씬 짧다.
교회는 성탄 대축일을 12월 25일 하루만 지내지 않고 다음 해 1월 1일까지 한 주간 동안 계속되는 팔일 축제를 지낸다. 이 팔일 축제는 부활 팔일 축제와 함께 전례주년의 2대 팔일 축제이다. 따라서 이 기간은 성탄 본날을 한 주간 더 연장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따라서 이 기간은 성탄 본날을 한 주간 더 연장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부활 팔일 축제는 대축일임에 비해 성탄 팔일 축제는 한 등급 낮은 축일에 속한다. 또 사실상 이 축제기간의 대부분은 성인 축일로 구성되어 있다. 순수한 팔일 축제일은 12월 29-31일 사흘뿐이다.
그러나 다른 날에도 성탄 감사송을 바치는 등으로 축제 전례는 계속된다.
1) 팔일 축제 중의 주일, 주일이 없으면 12월 30일 :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2) 성탄 다음 날인 12월 26일 : 성 스테파노 츳 순교자 축일.
3) 12월 27일 :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4) 12월 28일 :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
5) 1월 1일 : 팔일 축제의 마지막 날이자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6) 1월 2일과 5일 사이의 주일 : 성탄 제 2주일.한국 교회에서는 이날을 주님 공현 대축일로 지냄.
7) 주님 공현 대축일 다음 주일 : 성탄시기를 마감하는 주님 세례 축일.
이 축일 다음 날인 월요일부터 연중시기에 들어간다.
성탄시기는 축제 기간이기 때문에 성탄 전야 미사부터 백색 제의를 사용하며 (성 스테파노축일과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은 순교자 축일이기 때문에 홍색 제의 사용), 대림시기 중에 중단했던 대영광송을 노래한다.
특히 성탄 대축일의 모든 미사 중에 신앙 고백문을 외우거나 노래하는데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부분에서는 다른 날보다 특별히 고개를 깊이 숙인다. 성탄 본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성탄, 천주의 성모 마리아, 주님 공현, 주님 세례 등의 축일과 성인 축일 미사 외에 이 기간의 미사 제1독서는 요한 1서이다. 요한 1서를 사용하는 이유는 요한 1서가 성탄과 공현의 신비를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의 표현으로 선포하기 때문이다.
3.성탄의 의미
예수 성탄 대축일은 천주 성자께서 동정 마리아 태중에서 혈육을 취하여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탄생하였음을 경축하는 날이다. 그래서 초기에는 성탄 축일에 예수님의 성탄과 밀접한 목동들의 방문, 동방 박사의 조배, 헤로데의 어린이 살해 등의 사건도 함께 기념하였다. 그런데 라틴어의 '성탄(Nativitas)'은 이러한 생일의 의미 외에 신들이나 통치자가 공적으로 모습을 드러냄, 영광을 받음, 신이 됨(epiphaneia, theophaneia)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나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의 즉위일을 그가 신이 된 날로, 황제가 어느 도시를 공식 방문하면 신이 당신 모습을 드러낸 날로 기념하곤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서방교회의 성탄 축일은 동방교회의 공현 축일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날로 간주되었다.
단지 서방에서는 예수님의 역사적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 축일에 더 큰 비중을 두는 반면 동방에서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신 공현 축일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어디에 더 비중을 크게 두든지 성탄 축일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비천하고 연약한 인간으로 태어나신 날이고,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신 날이다. 하느님께서 비천한 인간이 되신 궁극적인 목적은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키고 인류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여기에 또 다른 성탄의 신비가 있다. 곧 하느님께서는 당산의 지존하신 본성을 더없이 낮추시어 죄와 고통과 죽음의 본성을 지닌 인간이 되시어 인간이 하느님과 화해하고 그분의 자녀가 되는 터전을 마련하셨다. 그래서 성탄을 하느님과 인간의 '기묘한 교환'이라고도 한다.
이 기묘한 교환은 성탄과 부활의 깊은 관계를 들어낸다. 예수님께서는 탄생과 더불어 당신의 지상 생활의 목적인 십자가와 수난을 통한 부활의 여정을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 축일과 공현 축일은 파스카 여정의 준비이자 시작이라 할 수 있다.
1. 사순 전례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
사람들은 살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많이 갖게 된다. 일상적인 사람에서 반성을 하고 또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신앙인 들에게는 전례를 통하여 더욱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많이 갖는다. 특히 사순 시기의 전례는 인생의 광야를 체험하도록 하고 있다.
허영과 위선에 가득찬 자기 자신을 죽이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듯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생화하기 위한 40일의 기간은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신앙과 인간적 성숙의 바탕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세속적 유혹과 불안으로 인해 앓기 쉬운 신앙인의 자세를 사순 기간의 삶을 통해서 되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순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에 모든 신앙인 들은 “사람은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창세기 3,19)는 말씀과 함께 머리에 재를 얹게 되는 상징적인 표현 속에서 우리가 돌아가야 할 지점을 생각하고 거기에 비추어 자신들의 사람을 바로잡기를 요청 받고 있는 것이다. 즉 세례 때의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되찾아 바른 양심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고 있는 것이 사순 시기이다.
2. 사순 시기의 의미와 유래
부활 축제를 준비하기 위한 40일 간의 기간으로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 전야제까지 계속된다.
사순 시기(40)의 의미는?
구약 성서에는
①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악으로 가득찬 세상을 정화하기 위하여 40일 동안 비를 내리셨다.(창세기 6,5-7,22)
② 에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노예 생활을 벗어나 하느님이 약속한 땅에 들어가기까지 그들은 40년 간 광야 생활을 하며 준비해야 했다.(신명기 29,4)
③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받기 위하여 40주야를 재를 지켜야 했다.(신명기 9,18)
④ 엘리야가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가기 위하여 40일 간을 밤낮으로 걸어야 했다.
신약 성서에는
①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주야를 단식을 하며 준비를 하셨다.(마태 4,1-11)
② 그리고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셨다.(사도행전 1,3)
앞에서와 같이 성서에서 나타나는 40이라는 수의 의미는 참회와 속죄로 우리 생활 전체를 혁신하고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합당한 준비를 하는 기간의 수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사순 시기 40일의 의미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돌아오기를 초대하는 하느님이 마련한 은총의 시기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사순 시기에 우리가 조용한 마음으로 지내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만 결코 부정적인 시간이 아니라 희망에 부풀어 생명의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시기인 것이다.
언제부터 지금과 같은 40일이 되었을까?
부활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현재와 같은 40일이 초대 교회로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① 박해 시기였던 초대 교회로부터 3세기 초 까지는 기한을 정하지 않고 부활 전 2-3일 간을 예수의 수난을 기억하며 지내던 것이 사순 시기의 전부였다.
② 그런데 313년 로마제국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처음으로 열린 니체아에서의 공의회(325년) 이후 부활을 준비하기 위하여 40일을 지내야 한다고 정하게 되었다.
그때의 40일을 계산하는 방법은 지금과는 차이가 있었다. 즉 성삼일로부터 거꾸로 계산하여 40일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사순 시기의 시작이 오늘과 같은 수요일이 아니라 오늘날의 사순 제1중에 해당되는 날이었다. 5주간 35일에 성주간의 성목요일 낮까지 하여 40일을 계산한 것이다.
사순절이 40일로 정해진 후에도 초기에는 이 기간에 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차차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재를 지켰다는 생각, 그리고 대죄를 지은 사람에게 보속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또 새로 영세 받을 사람들을 잘 준비시키기 위하여 사순시기에 재를 지키게 된다. 그런데 이 기간 중에도 주일만큼은 주님의 부활 경축하는 시기라는 생각에서 재를 지키지 않았다. 그래서 주일을 제외한 나머지 34일에다 전에부터 지켜 오던 성금요일과 성토요일을 포함해서 36일 간 재를 지키며 지내 왔다.
③ 그 후 7세기경 교황 그레고리오 1세(재위 590-604)때에 온전히 간 재를 지켜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어 이미 지켜 오던 36일에다 4일을 추가하여 지금과 같은 사순 시기가 확정되었다. 그래서 현재의 사순 시기의 ‘재의 수요일’로부터 시작되어 46일이 된 것이다.
3. 사순 시기에는 어떻게 살고 어떤 준비를 하는가?
40일이라는 기간은 속죄로 우리의 생활을 바꾸고 하느님과의 새로운 만남을 위하여 합당한 준비를 하는 기간이며, 장차 이루어질 중대 사건인 부활을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하는 기간이다. 그러기 위해 합당한 준비가 필요한데 크게 보면 외적 준비와 내적 준비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준비를 모두 일컬어 넓은 의미로 사순 시기에 재를 지킨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 재를 지킨다고 할 때는 대재인 단식과 소재인 금육을 말하는 것이다.
1) 외적 준비 이러한 준비는 소극적인 준비로 교회가 정한 단식과 금육을 실천하는 것이다. 본래 단식과 금육은 교회법규에 의해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실철하던 것을 교회가 법규로 도입을 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가지 동기에서 자발적으로 재를 지켜 왔다. 예를 들면 기도에 열중하기 위해, 죄를 보속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그리고 축제를 준비하기 위해 재를 지켜 왔다. 특히 부활 축일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초창기부터 신자들 스스로 몇일 동안 재를 지켜 온 것이다. 본래 단식은 그 날 한 끼만 식사를 하는 것으로 처음에는 저녁 식사만 하도록 하였다. 그 후 점차로 교회의 단식 규정이 세분화되면서 육식을 금하는 금육 규정이 첨가되었다. 오늘날 단식의 규정을 보면 단식은 만21세부터 만60세까지의 모든 사람이 지키도록 하고 있다. 그 방법은 아침은 거르고 점심은 제대로 먹고 저녁은 요기만 하는 것으로 하고있다. 그 시기는 재의 수요일고 성금요일 1년에 2일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환자나 수험생 혹은 의무 복무중인 병사 등에 대해서는 단식을 관면하고 있다. 그리고 육식을 금하는 금육 규정만은 만14세로부터 죽을 때까지 지키도록 하고 있다. 금육에서 우유, 계란, 생선 등은 제외되며 금육을 하는 시기는 과거에는 우리 나라에서만 재의 수요일과 사순 시기의 매 금요일에 지키도록 하였으나 현재에는 재의 수요일과 연중 모든 금요일에 지키도록 하고 있다. 단식과 마찬가지로 예외의 사람들에게는 관면을 하고 있다. 외적 준비 없이 내적 준비를 갖추기는 힘들다고 보기 때문에 외적 준비인 음식 절제로부터 자신의 준비를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금육과 단식을 단순히 그 자체를 위해서 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위한 단신과 금육을 강조하고 있다.
2) 내적 준비 이 준비는 적극적인 준비로서 하느님을 행하는 마음과 전례 예절을 통한 준비라 할 것이다. 회개와 속죄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쇄신하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의 전례는 사람들이 이런 적극적인 준비를 잘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미사 때나 말씀의 전례에서 알렐루야와 대영광송을 하지 않으며 사제가 입은 제의의 색도 회개와 보속을 상징하는 자색(보라색)이다. 그리고 전례의 말씀들은 온통 이런 준비를 계속할 수 있는 말씀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신앙인들은 이 시기에 평일 미사에 까지 참석하며 하느님을 향한 회개의 삶을 다짐하고 교회가 배려한 사순절 특별 강론을 등에 참가하며 고백 성사를 통해 하느님과 화해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이 부활을 앞둔 시기에 꼭 고백성사를 보고 부활 시기에 영성체를 하는 것을 교회법상의 의무규정으로 두고 있다.
4. 사순 시기에는 꼭 알고 참석해야 하는 특별한 전례는 어떤 것이 있나요?
1) 사순 시기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 사순 시기의 시작은 재의 수요일 미사에서 이마에 재를 받으며 시작된다. 재의 수요일에 사용되는 재는 지난 해 성지 주일에 축성하여 한 해 동안 각 가정의 십자 고상 위에 걸어 두었던 성지 가지를 미리 걷어서 태운 후 재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다. 재의 수요일 미사의 강론이 끝난 후 사제는 기도를 하여 재를 축성한 다음 그 재를 찍어 자신의 이마에 십자 표시를 그으며 바르고 다음 모든 신자들에게 발라 준다. 이 때 사제는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시오."(창세기 3,19)또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15)라는 권고를 한다. 이는 "그리하여 제 말씀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욥 42,6)는 말씀처럼 우리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와 보속의 마음 자세로 재를 얹고 사순 시기를 지내라는 초대의 말씀인 것이다.
① 성서에 나타나는 재의 의식 구약 성서에는 욥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련을 받으면서 자신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잿더미에 앉았고(욥기 2,8)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의 태도도 그러하였다.(요나 3,6) 신약 성서에서도 같은 의미가 마태 복음 11장21절에 나타난다. 이런 성서의 말씀과 같이 사순 시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에 이마에 재를 얹으며 인생의 무상함을 깨우치고 조에 대한 보속을 준비하고 앞으로 다가올 부활을 준비하는 새로운 시작의 시간인 것이다.
② 재의 의미 성령의 지시에 따라 예수께서 광야로 들어섰듯이 우리도 머리에 재를 얹고 사순 시기의 광야로 들어서게 된다. 이 사십일 동안 우리는 화려함과 풍족함을 피하고 광야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사람들이 인생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신앙인이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즉 사순 시기를 시작하며 이마에 재를 받은 인간은 죽으면 모두 결국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는 예식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기에 재의 수요일에 재를 받으며 우리는 인생이 무상함인 것을 인정하며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확고한 생사관을 확립하려는 결심이 필요한 것이다. 2) 사순 시기의 절정인 성 주간 재의 수요일로 시작한 사순 시기는 성 주간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성 주간은 성지주일부터 시작되는 사순 시기의 마지막 한 주간이다.
성주간 전례는 우리 신앙 생활의 중심이 되는 전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성 삼일과 부활 성야의 전례가 그 핵심이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생전에 그들에게 하셨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었는가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수난과 죽음,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그 분의 행적을 다시 더듬게 되고 생전에 하신 말씀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며 세상 사람들에게 증언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말씀과 행적들을 공동체 안에서 생활 속에 표현하고 생활화한 것이 바로 전례인 것이다.
사순 시기에는 꼭 알고 참석해야 하는 특별한 전례
1) 사순 시기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
사순 시기의 시작은 재의 수요일 미사에서 이마에 재를 받으며 시작된다. 재의 수요일에 사용되는 재는 지난 해 성지 주일에 축성하여 한 해 동안 각 가정의 십자 고상 위에 걸어 두었던 성지 가지를 미리 걷어서 태운 후 재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다.
재의 수요일 미사의 강론이 끝난 후 사제는 기도를 하여 재를 축성한 다음 그 재를 찍어 자신의 이마에 십자 표시를 그으며 바르고 다음 모든 신자들에게 발라 준다. 이 때 사제는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시오.”(창세기 3,19)또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15)라는 권고를 한다.
이는 “그리하여 제 말씀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욥 42,6)는 말씀처럼 우리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와 보속의 마음 자세로 재를 얹고 사순 시기를 지내라는 초대의 말씀인 것이다.
① 성서에 나타나는 재의 의식
구약 성서에는 욥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련을 받으면서 자신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잿더미에 앉았고(욥기 2,8)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의 태도도 그러하였다.(요나 3,6) 신약 성서에서도 같은 의미가 마태 복음 11장21절에 나타난다.
이런 성서의 말씀과 같이 사순 시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에 이마에 재를 얹으며 인생의 무상함을 깨우치고 조에 대한 보속을 준비하고 앞으로 다가올 부활을 준비하는 새로운 시작의 시간인 것이다.
② 재의 의미
성령의 지시에 따라 예수께서 광야로 들어섰듯이 우리도 머리에 재를 얹고 사순 시기의 광야로 들어서게 된다. 이 사십일 동안 우리는 화려함과 풍족함을 피하고 광야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사람들이 인생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신앙인이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즉 사순 시기를 시작하며 이마에 재를 받은 인간은 죽으면 모두 결국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는 예식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기에 재의 수요일에 재를 받으며 우리는 인생이 무상함인 것을 인정하며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확고한 생사관을 확립하려는 결심이 필요한 것이다.
2) 사순 시기의 절정인 성 주간
재의 수요일로 시작한 사순 시기는 성 주간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성 주간은 성지주일부터 시작되는 사순 시기의 마지막 한 주간이다.
성주간 전례는 우리 신앙 생활의 중심이 되는 전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성 삼일과 부활 성야의 전례가 그 핵심이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생전에 그들에게 하셨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었는가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수난과 죽음,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그 분의 행적을 다시 더듬게 되고 생전에 하신 말씀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며 세상 사람들에게 증언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말씀과 행적들을 공동체 안에서 생활 속에 표현하고 생활화한 것이 바로 전례인 것이다.
1. 전례와 상징
부활은 신비이다.
교회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밤(부활성야)에 구원의 신비에 감추어진 모든 이야기를 집중시키려 한다.
즉 말과 상징의 언어를 총동원한다. 부활 성야의 예절 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제1부 빛의 예식,
제2부 말씀의 전례
제3부 성세 예식,
제4부 성찬의 전례이다.
빛의 예식에는 불 축성과 초 준비가 있다. 이 모든 예식은 밤에 거행된다. 즉 밤이 시작되기 전에 시작하지 말고 날이 밝기 전에 마쳐야 한다. 이밤은 오랜 관습에 따라 주님을 기억하는 밤이고, 루가복음(12, 35)의 권유에 따라 등불을 밝혀 들고 주인을 기다리는 충성스런 종처럼 깨어 준비하는 밤이다. 불의 축성은 고대 로마 전례에는 없었다. 아마도 프랑크 지역의 이교적인 봄맞이 불로 잡신에게 풍년과 다수확을 기원하던 관습에서 나왔을 것이다. 빛은 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의 선물이었고 이스라엘 백성 역시 야훼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생각하였으며 그리스도인들도 춧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
촛불은 자신을 소모하여 빛과 따스함을 준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에 빛과 사랑을 주셨다.
불을 축성하여 부활 초에 붙이는 것도 자신을 봉헌하는 빛의 상징이다. 부활 초는 초기부터 로마와 기타 지역에서 부활 성야를 밝히는 데 사용하였다. 이 초는 스스로의 빛을 통하여 죽음의 `밤에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원래는 사람 키만한 두 개의 초를 사용했었다. 빛의 예식은 부활 초의 품위와 상징을 표면에 나타낸다. 십자가 표시는 그리스도를, 알파와 오메가는 시작과 마침 또는 영원을 뜻한다.
그 해의 연수는 인간의 시간 생활을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연결하고 있다. 다섯 개의 붉은 향덩이는 예수님의 다섯군데 상처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광명" 을 노래하며 춧불을 붙여 행렬함은 그리스도의 말씀 자체를 연상케 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 12).
또 다른 의미는 구약성서에서 에집트를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밤길을 비추는 횃불을 연상케 한다. 주님이 몸소 밤길을 비추며 앞서 가신다. 그분은 죄악의 어둠을 몰아내는 불기둥이시다. 그분은 죄악의 어둠을 몰아내는 불기둥이시다. 신자들이 촛불을 들고 뒤따를 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들린다. 부활 찬송은 밤과 빛의 대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하느님과 세상과 만남, 승리자로서의 하느님, 암흑의 세상에 파견된 빛이신 그리스도를 묘사한다. 세상이 구세주를 주범으로 판결하고 진리와 사랑을 사형에 처했지만 부활을 통하여 빛이 승리를 거둔다. 부활 찬송은 주님의 부활을 알리는 기쁨의 노래이며 부활 예식의 정점이다. "... 영원한 대왕의 광채 너를 비춘다. 비춰진 땅아, 모두 깨달으라. 세상 어두움 사라졌다..."
1)성수 축성
초기 그리스도교는 부활주일에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준비가 되면 언제라도 예비자에게 세례를 준다.
이때 성세수를 사용하는데 부활 성야에는 성세 준비자들이 없더라도 성세수를 축성한다. 물은 낙원과 풍요를 연상시킨다. 또한 생명체의 시작도 물에서 비롯된다(창 1, 1-2;2,6-7). 태초에 모든 생명이 바다에 있었듯이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태아도 바닷물 같은 양수에서 자라게 하시고, 영세자의 천성적 탄생 역시 물에서 시작하신다. 성세수는 부활 초를 세 번 물에 담가 축성한다. 셋이란 수는 완전을 뜻하고 성스러운 숫자로 사용된다. 물은 세탁, 풍요, 소생, 생동의 힘을 가지고 있다. 세례를 받을 때 십자가 희생을 통하여 은총의 샘물이 흐른다. 세상의 값진 원천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나온다. 성수축성 때에 부활 초를 물에 담그는 것은 하늘과 땅이 상징적으로 결합하는 뜻이다. 태양빛을 반사하는 세상의 물에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아름다운 면모를 이미 체험하고 있다.
2)알렐루야
사순절 동안 보류했던 알렐루야를 오늘 밤 다시 노래한다. 힘을 다하여 아름답고 즐겁게 하느님을 찬미한다. 부활 찬송, 부활 성가, 알렐루야 등의 노래는 근본적으로 기쁨의 표현 이외에 별다른 것이 아니다. 진정한 비쁨의 노래는 인간 이성의 벽을 뚫고 무아지경에 이르게 한다. 여러 성가 중에서 알렐루야가 가장 순수한 마음의 표현이 아닌가 생각한다. 알렐루야란 원래 "하느님 야훼를 찬미하다"란 뜻이다. 그러나 이 밤 예절에서는 더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알렐루야'는 번역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의 자기 표출이다. 말이 필요없고 기뻐 용약할 뿐이다. 사순절 동안 절제했던 대영광송과 종도 함께 즐거이 울려 퍼진다.
2. 부활주일의 변동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사건은 역사적으로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망일이 현재의 달력으로 어느 날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네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유다교의 해방절 주간 금요일이라고만 되어 있다. 유다인들은 음력으로 니산월(유다 면력으로 7월, 우리나라 3-4월에 해당) 14일을 빠스카 축일로 지냈으나 서방 교회는 그 다음날인 일요일을 부활절로 경축하였고 니체아 공의회(325년)에서는 춘분(3월 21일) 이후 만월이 되면서 맞는 첫주일을 부활축일로 규정하였다. 신학자들은 가장 신빙성있는 날짜로 예수의 사망일을 기원 후 30년 4월 7일이라고 보고 있다. 이 의견을 그대로 믿는다면 30년 4월 9일 일요일이 예수 부활날이 된다. 그렇다면 4월 둘째 토요일이 지난 후 주일은 4월 9-15일 사이이고, 4월 둘째 주일이라면 4월 8일-14일까지이니 이 중 하루를 부활주일로 고정시키면 어떠냐는 주장이 많았다. 부활주일을 고정시키면 매년 달라지는부활축일 때문에 겪는 혼란과 어려움도 없어지니 신자들의 생활에 도움을 주지 않겠는가? 춘분 이후 부활 주일이 될 가능성은 3월 22일-4월 25일 사이의 5주간이나 된다. 그래서 매년 사순절의 시작과 부활, 승천, 성신 강림 축일이 우리 달력에서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전례헌장 부록에 보면 제2차·바티칸 공의회에서도 빠스카 축일을 일정한 주일로 고정시키자는 많은 사람들의 원의를 중요시하였다. 숙고한 결과 당시(1965년두 가지 결론이 나왔다.
① 공의회는 갈라진 형제들이 동의한다면 빠스카 축일을 일정한 축일로 정하는데 반대하지 않는다.
② 동시에 국가적으로 영구 달력을 도입하려는 시도를 반대하지도 않는다. 물론 주일을 포함한 7일로 구성된 주간이어야 한다.
축일을 고정시키는 문제로 프로테스탄트 교파와 합의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 이미 마르틴 루터는 부활시기의 변동에 대한 불만을 표명하였다. 그래서 이동 축일들을 그네처럼 왕복한다고 보아 '그네 축일들'이라고 불렀다. 난관은 동방 교회에 있다. 1923년 이스탄불에서 열린 범그리스 정교회 총회에서 부활축일의 고정을 하자는 주지시켰으나 현행 그레고리오력에 맞추기를 원치 않았다. 1965년에는 부활축일을 4월 둘째 토요일 다음 일요일로 설문조사에서도 각 교회들의 전반적인 찬성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1975년 나이로비에서 개최된 세계 기독교 교회 일치 위원회의 노력도 허사가 되었다.
이미 가톨릭 교회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인 '동방 교회에 관한 교령' 20항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같은 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툭일을 지내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바라는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는 잠정적으로 같은 지방이나 같은 나라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나마 같은 날에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총주교들과 그 지방교회 지도자들에게 맡기는 바이니, 관계자들끼리 의논해서 주일 부활축일을 지내는데에 만장일치로 합의하기를 바란다." 이처럼 갈라진 교회 가운데 동방교회 특히 그리스 정교회가 찬성하지 않고 있다.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이지만 무리하게 앞당길 필요는 없다고 본다.
승천은 새로운 강림
제1독서 사도 1,1∼11
(예수께서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
제2독서 에페 1,17∼23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하늘나라에 불러 올리셔서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복 음 루가 24,46∼53
(예수께서 그들을 축복하시면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사실은 크리스천들에게 하나의 커다란 확신과 희망을 안겨 주게 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리스도와 같은 승천의 영광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승천은 이 다음 우리에게 돌아올 영광의 예표요 보증인 것입니다.
성서에 보면, "사람의 아들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다니 7,13). 유대인들은 모두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내용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지는 않습 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하늘에 떠 있는 어떤 장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의 승천을 말한 작가는 루가뿐입니다. 루가는 사도행전과 루가복음 두 권의 책을 썼는데 루가복음은 예수님의 승천으로 끝을 맺고 있으며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사실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루가는 예수님의 승천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 영광의 예수님은 먼 나라에 계셔서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이 이별된 것이 아니라 새롭고도 더 완전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계 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승천은 이별의 슬픈 장면이 아니며 새롭게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만나는 기쁨과 은혜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승천'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승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모습을 감추신 것은 확실하지만,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체험할 수 없는 먼 거리로 가신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시 오셔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승천은 떠나심과 동시에 새롭게 찾아 주신 사건입니다.
얼마 전에 자녀 때문에 고생하시는 어떤 자매님이 찾아와서는 이야기 끝에 주님은 자기를 버리셨다고 했습니다. 너무도 고생이 많 았고 너무도 서운함이 컸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오해입니다. 주님은 우리 생애의 어느 한 시기도 떠나신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해도 그분은 우리를 버리거나 포 기하지 않으십니다. 지옥의 문턱을 넘어서기까지는 하느님은 항상 우리에게 희망을 갖고 계시며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힘들거나 어려운 때, 그리고 슬프거나 외로울 때 주님의 현존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높은 산을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 승천 대축일에 산이나 들에서 야외 미사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념이지 산이나 들만이 주님을 만나는 장소는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선 마음만 먹으면 됩니다. 우리가 그분을 찾으면 그분은 또 보여 주시고 우리가 그분을 부르면 또 그 분이 우리에게 대답을 주십니다. 어떤 장소와 시간도 구애받지 않으시고 원하는 시간마다 원하는 방법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어떤 형제가 예수님을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했지만 늙어 죽을 때까지 그 꿈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도 않았고 또 사랑하시지도 않은 것 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 병자성사를 받을 때 신부님께 그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이 그러셨습니다.
"평생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속에 사셨으면서도 하느님을 못 보 았다고 하십니까? 자, 여기 예수님을 만나십시오."하며 성체를 영해 주시는데 형제는 그때 비로소 주님의 현존을 체험했다면서 지나온 생에 대한 감사와 회개를 눈물로써 고백했다고 했습니다.
옛날 필립보가 예수님께 "아버지 좀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하셨습니다. 우리도 사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보고 싶어합니다. 예수님을 꿈 속에서라도,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해답이 바로 승천입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의 그 모습으로 우리 앞에 존재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하느님만의 특별한 존재 방법으로 우리 앞에 계실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뵙지 못하는 것은 다만, 우리의 마 음과 신앙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승천의 믿음을 활짝 엽시다.
자료출저: 가톨릭 신문
"오순절이 되어 신도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들이 앉아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혀같은 갓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위에 내렸다." (사도 2,2-3)
예수 부활 대축일로부터 만 7주간이 되는 50일째 되는 날을 성령강림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축일의 신약적 기원은 사도행전 2장 1절에 기인하고 있다. 오순절은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기념해오고 있는 과월절, 처막절과 함께 3대 축일다. 오순절은 칠주제(七主祭)라고도 불리우며, 이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첫 곡식을 바치곤 했다. 특히 이 오순절은 시나이 산의 계획과 긴밀히 연결되고 있는데 이집트 탈출 50일째 되는 날에 (출애 19, 1-16) 시나이 산에서 모세가 하느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아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날이기도 한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것은 곧 예수께서 주신 약속의 선물, 즉 성령, 사랑의 새법과 상통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이해할 수 있고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받은 새로운 계명의 의미를 보다 깊이 알아들을 수 있다. 오순절은 바로 우리 삶의 시작, 우리 삶의 현장이다. 예수를 보지 못해도 확신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의 현장이다. 오순절은 곧 천상 예루살렘의 지상 실현을 예시적으로 보여준 종말의 의미를 지닌 사건이기도 하다.
삼위일체
삼위일체의 교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이지만 이 신비 앞에서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육화의 신비, 즉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교리도 인간 의식의 한계를 초원하며 동정녀의 예수 탄생 사건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루가 1장 35절에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아들을 낳게 되리라고 말하는 장면과 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에서 성령은 비둘기 모양으로 , 성부는 소리로서 나타남으로(루가 3,21-22 참조) 우리에게 계시된다.
예수 자신도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라." (마태 28,19)고 하셨다.
하느님은 한분이시지만 성부,성자,성령 삼위가 계시고, 성부는 창조주이시고, 성자는 구원자이시며, 성령은 성부와성자로부터 발하셨다. 이 삼위께서는 각각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영으로서의 일을 하신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 산다는 것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제3위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면서 우리를 도와주는 "협조자"(요한 14, 16)다. 가톨릭 신앙은 하느님이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의 가장 내밀한 곳에 거하심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은 단순히 우리가 마음으로 느끼는 하느님의 은총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완전한 하느님이다. 성부, 성자와 함께 성삼위 가운데 다른 위격과 구분되는 완전한 한 위격이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함께 영원하고 동등하다.
성령강림 사건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오순절에 내려온 성령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었다. 성령은 인류 역사에 구체적으로 개입하는 하느님의 현존이 되면서 구원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개막한다. 우리는 성령강림을 통해 비로소 새로운 생명을 맞볼 수 있게 된것이다. 부활한 예수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여러분은 며칠 수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사도 1,5)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성령은 우리를 깨끗이 정화시키고 생명을 주고 하느님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불붙여 주며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게 한다.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은 자주 감사와 찬미를 드리게 되고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는 하느님을 체험한다. 성령을 통하여 성부는 죄로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며 마침내는 그들의 죽은 육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시킨다.
(로마 8, 10-11)
성령은 교회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교회가 교회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다. 성령이 교회 안에 존재하기에 교회는 신앙의 유산을 간직하고 실천하며 모든 믿는 이들을 하나의 백성으로 유지한다. 성사도 모두 성령이 있기에 가능하다. 세례성사는 물과 성령으로 베풀어지며 고해성사도 사죄경 자체가 죄의 용서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드러내고 있다. 병자성사의기도문은 성령의 은총을 비는 청원이며 미사의 성찬기도에선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제병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 성령은 교회와 신자들의 마음을 성전삼아 그 안데 거처하고(Ⅰ고린 3, 16. 6, 19)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거한다. (갈라 4, 6) 성령은 교회를 온전한 진리에로 인도하고(요한 16, 13) 일치시키고 교회를 가르치고 지도하며 항상 새롭게 한다.
성령의 선물과 특은
성령은 성화의 은총으로 죄를 없애고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할 자격을 주며 영신적으로 새 사람이 되는 힘을 준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초자연적인 덕성을 주어 사람이 구원진리를 올바로 믿게 한다. 성령은 이 기본 삼덕(믿음, 희망, 사랑)을 완성하는데 유익한 도움을 특히 견진성사를 통해준다. 견진성사의 여러 가지 도움을 교의신학에선 7가지로 분류한다. 인간의 지성과 관련이 깊은 슬기(sapientia), 지각(intellectus), 의견(consilium), 지식(scientia)과 인간의 의지에 관계가 깊은 용기(fortitudo), 효경(pietas),두려움(timor)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성령의 모든 은사들을 이 7가지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
성령의 식별
성령 영성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올바른 성령의 식별이다. 바오로 사도가 열거하는 은사들 가운데는 "어느 것이 성령의 활동인지를 가려내는 힘"(Ⅰ고린 12, 100)이 있다. 교회는 이 특은이 각별히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내밀한 욕망, 세속적인 활동등이 마치 성려의활동인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언사나 행위가 신앙에 순종하고 믿음과 사랑으로 일치와 평화를 도모한다면 그것들은 성려의 업적임에 틀림없다. 그 대신 신앙을 등지게 하고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일치를 위협한다면 그것은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Ⅰ요한 4, 2-6)
성령에 의한 결과는 무질서가 아닌 평화다.
성령과 영성생활
신자들 중에는 의외로 성령의 존재에 대해 무감각한 이들이 많다. 교회는 신자들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화살기도나 청원기도에 그칠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이있는 영성생활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깊이있는 영성생활은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살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개개인의 영성을 재는 척도는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령은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보다 차원높은 영적인 삶으로 옮마갈 수 있다. 많은 성직자들은 "라디오 채널을 맞추듯 항상 성령의 목소리에 안테나를 세우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신앙생활을 해야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신앙인은 대부분 "항상 찬미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고백한다. 그들은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는 하느님을 직접 체험한다. 성령은 하느님과의 친교로 인한 내적인 충만감을 맛보게 한다.
성령을 체험하면 마음의 문이 열리고 일상을 찬미 속에서 살도록 한다.
1.예수 성심 공경의 의의
예수의 성심을 공경하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 때문에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심장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고 우리 죄를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인격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기관이고, 예수님의 영혼에 그리고 천주 성자위(聖子位)에 결합되어 있어 공경의 대상이 된다. 마음의 상태를 제일 먼저 드러내는 기관이 심장이다.
그래서 우리는 즐거운 마음, 사랑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겸손한 마음, 슬픈 마음, 기쁜 마음이라는 말을 쓰고 심장을 이런 마음의 상징으로 삼는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신자들은 성심을 열심히 공경함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확고히 다지고 많은 냉담자를 회개시켰으므로 예수성심 대축일 감사송에서 "모든이가 구세주의 열리신 성심께로 기꺼이 달려가 끊임없이 구원의 샘물을 펴내나이다"하며 감사의 기도를 바친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그 열정이 십자가를 선택하게 하였고 그분의 끊임없는 사랑이 성사 안에서 우리를 끌어당기며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있다.
성 보나벤뚜라는 "십자가 위에서 잠드신 그리스도의 늑방(심장)에서 교회가 생겨나고,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419, 37)'라는 성서 말씀이 성취되도록 하느님의 성의(聖意)는 한 병사가 창으로 그 거룩한 늑방(심장)을 헤쳐 열어 우리 구원의 대가인 피와 물이 훌러나오도록 했다.
그분 성심의 은밀한 샘에서 흘러나온 이 피와 물은 교회의 성사에 은총의 생명을 베풀 힘을 주었고, 이미 그리스도 안에 사는 이들에게는 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 게 하는 생명수가 되었다"(생명의 나무에서)고 했다.
2. 예수 성심 공경의 중요성
예수 성심을 믿는 마음으로 열성을 갖고 생활하는 데 있어서 그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내적 신심으로서의 정신적 측면이다.
(1) 그리스도를 깨닫고 알기 위해 주의 생애, 수난, 성체를 깊이 묵상하면서 주의 성심을 사랑하도록 힘써야 한다.
(2) 예수 성심을 사랑해야 한다. 성심의 사랑은 특별히 성체성사에 담겨 있으니 성체 앞에서 조배드리고 묵상하고 기도함으로써 공경해야 할 것이다.
예수 성심을 믿고 생활하는데 있어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외적 신심이다. 외적 신심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몇가지만 알아보면,
(1) 예수성심 대축일 : 성체성혈 대축일 후 금요일을 축일로 정하고 배반 당하신 성심을 위로한다. 매달 첫 금요일에 미사에 참여하면서 예수의 수난과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팽개쳐져 있는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보상하는 지향을 두고 영성체하기를 아홉달 동안 계속한다.
(2) 성시간 : 죽음의 고통에서 고민하신 예수의 수난에 관하여 묵상하거나 합당한 기도를 바친다.
(3) 예수성심 성월에는 특별히 예수 성심께 자신과 가정을 봉헌하고 기도를 바친다.
예수 성심은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므로 우리 모두는 예수 성심을 공경해야 한다. 특별히 성체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은혜와 그리스도의 마음과 일치할 수 있는 생활을 하도록 주님께 청해야 하겠다.
1. 묵주기도 성월의 유래
묵주기도 성월은 개인과 가정성화, 인류구원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묵주기도를 바치는 달로, 묵주기도로 승리를 거둔 레판토 해전의 날(10월7일)을 기념하여 교황 비오 5세가 이 날을 묵주기도의 기념일로 정하였다.
그후 1883년 발표한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수프레미 아포톨라투스』(Supremi Apostslatus)에 의해 10월이 묵주기도 성월로 설정되었다.
2. 묵주기도의 유래
묵주기도(로사리오)의 뜻은 ‘장비꽃다발’이라는 뜻이다. 묵주기도의 기원은 초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교인들은 자기자신을 신(神)에게 바친다는 의미로 머리에 장미꽃으로 역은 관을 쓰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것이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전해져 신자들은 기도 대신 장미 꽃을 봉헌하곤 했다. 특히 박해 당시 신자들은 원형 경기장인 콜로세움에 끌려가 사자의 먹이가 될 때 머리에 장미꽃으로 엮은 관을 썼는데 이것은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게 자신을 바치는데 합당한 예모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박해를 피한 신자들은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면서 순교자들이 썼던 장미 꽃송이마다 기도를 한가지씩 바쳤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는 이집트 사막의 은수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시편 150편을 외웠는데, 작은 돌멩이나 곡식 낱알을 머리에 쓰는 관처럼 둥글게 엮어 하나씩 굴리며 기도의 횟수를 세었다고 한다. 이때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시편 대신 ‘주님의 기도’를 150번 바치기도 했으며, 수를 셀 때 불편하였기에 열매나 구슬을 150개를 노끈이나 가는줄에 꿰어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런 관습들이 묵주기도를 탄생시키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12세기 삼종기도가 널리 보급되면서부터 성모신심의 영향으로 주님의 기도 대신 성모송으로 대체되어 바치다가 13세기부터는 영광송이 삽입되었다. 또한 이 당시 ‘알비파’이단의 세력이 교회를 위협하자 성모님이 도미니꼬 성인에게 나타나셔서 이단을 없애는 무기로 묵주를 주셨고, 성인은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를 적극적으로 권장하여 알비파 이단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때부터 ‘묵주기도’라는 정식명칭이 생겼고, 그후 15세기부터는 도미니꼬 수도회에의해 전 세계로 퍼쳐 성모신심의 기도가 ‘매괴회’가 생길 정도로 공식화 된 기도가 되었다.
3. 묵주기도의 내용
묵주기도는 환희의 신비와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가 있다 3가지 신비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환희의 신비
1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심을 묵상합시다.
2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합시다.
3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낳으심을 묵상합시다.
4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심을 묵상합시다.
5단 마리아께서 잃으셨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심을 묵상합시다.
2) 고통의신비
1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땀 흘리심을 묵상합시다.
2단 예수님게서 우리를 위하여 매맞으심을 묵상합시다.
3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시관 쓰심을 묵상합시다.
4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심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5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3) 영광의 신비
1단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묵상합시다.
2단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을 묵상합시다.
3단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을 묵상합시다.
4단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하늘에 불러올리심을 묵상합시다.
5단 예수님께서 마리아께 천상 모후의 관을 씌우심을 묵상합시다.
우리가 묵주기도를 바칠 때에는, 각 단의 신비 내용을 진정으로 묵상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지향을 생각한다거나 성모송, 주님의 기도 등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지향은 묵상 전에 세우고 생각해야지 묵상 중에 하면 역시 일종의 분심이 되는 것이고 주님의 기도나 성모송을 암송하는 것은 이런 간단한 내용의 기도를 반복하여 외움으로써 잡념을 쫓고 마음을 가라앉혀 기도와 묵상에 전념케 하려는 것이지 그 기도의 내용을 생각하라는 것은 아니다.
묵주기도의 원칙은 15단을 모두 바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1/3도 ‘묵주기도’라 한다. 그래서 전대사를 받기 위해서는 다음 사항이 따라 온다.
① 묵주기도 15단의 1/3을 바치면 되지만, 5단을 계속 바쳐야 한다.
②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소리 내어 바쳐야 한다.
③ 공동으로 바칠 때는 지역게 따라 인정받는 구원의 신비를 알리는 기도문(구원의 기도)을 외워야 한다
그러나 사적으로 바칠 때엔 기도문을 반복하면서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는 것으로 족하다. 묵주기도 중에서 7단으로 된 묵주가 있다. 이는 성모님의 칠고칠락을 묵상하면서 바치기 위한 것이다. 5단의 색이 각각인 5색 묵주는 각각 5대륙을 상징하며 세계 평화의 뜻을 나타낸다.
4. 묵주기도의 영성
묵주기도는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가 아니다. 묵주기도는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이다.
만약 묵주기도가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라면, 왜 성모님 상(像) 중에 묵주를 들고 묵주기도를 드리고 있는 성모님 상이 있겠는가? 만약기도가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라면 성모님이 묵주를 들고 기도하는 모습이 있을 필요가 없지 않는가? 그러므로 묵주기도를 성모님께 바친다는 이야기는 맞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깊숙이 묵상에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예수를 중심으로 하지 않고 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묵주기도는 오히려 성모님을 슬프게 한다. 왜냐하면 성모님의 중심은 예수였고 성모님의 모든 것이 예수를 향하고 있었으므로 묵주기도의 모든 묵상은 예수님을 향해야 한다.
5. 묵주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약속
① 1872년, “만일 네가 구원을 찾는다면 묵주기도를 전파하라”
② 묵주의 구일 기도 ? 1884년, “나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간청의 뜻으로, 감사의 뜻으로 각각 세 번의 묵주기도를 9일간 할 것이다. (환희, 고통, 영광의 신비 3*9 = 27 일 / 간청, 감사 27*2 = 54일)
③ 파티마의 기도(1917년 7월 13일) ? “예수여 우리 죄를 용서하시며 우리를 지옥불에서 구하시고, 연옥 영혼을 돌보시되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라는 구원의 기도를 알려 주셨다.
④ 위대한 약속 ? 1917년 파티마에서 루시아에게 발현하셨을 때 여섯 달 동안 계속하여 첫 토요일에 고해성사, 영성체, 묵주기도를 바치면 죽을 때 필요한 은총으로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성모 마리아의 대관식」으로 불리는 이 작품은 하늘의 뭉게구름 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대관식의 광경을 장엄하게 표현하고 있다. 엘그레코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깊이 묵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에는 성모 마리아의 대관과 관련된 내용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아래의 구절을 염두에 두고 대관식 그림을 구상한 듯하다.
『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별이 열두 개 달린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나타났습니다.』(요한 묵시록 12,1). 화면의 중앙에 그림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성모 마리아가 기도하듯 양손을 모으고 초생달 위에 앉아 있다. 일찍이 천사의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듣고서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며 손을 모았던 마리아는 대관식이 이루어지는 그 영광스러운 현장에서도 변함없이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며 손을 모으고 있다.
성모 마리아의 양 옆에는 성자 하느님과 성부 하느님께서 각각 왼손에 권능의 지팡이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왕관을 들어 성모 마리아의 머리 위에 씌워 주려 하고 있다. 구름 사이로 드높은 하늘이 열리고 성령 하느님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양 날개를 활짝 펴고 축복해 주는 모습이다.
드높은 천상에서 이루어진 성모 마리아의 대관식에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무수한 천사들과 성인들이 함께 한 것으로 전해진다. 엘 그레코가 그린 성모 마리아의 대관식 장면은 매우 고요하면서도 거룩한 분위기를 풍겨주고 있다. 이 사건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천상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엘그레코는 다른 분위기로 표현했을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보는 성모 마리아나 하느님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우수에 젖어 있지만 진지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는 게 엘 그레코 그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 말씀에 순명하며 사셨던 성모 마리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범이 되는 분이시다이 세상에서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온전히 그 말씀에 따라 사셨던 마리아를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시고 드높여 주신 사건이 바로 「성모 승천」이다.
일찍이 성모 마리아에게 일어났던 승천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희망의 표상이 되기도 한다. 우리들 역시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에 따라 살면 승천하신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며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기리는 성모 승천 대축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축일이기도 하다.